[조명래 칼럼] 시간의 의미

시간의 의미

조명래(환경정의 공동대표, 단국대 교수)

프랑스 사회학자 뒤르켐은 인간만이 시간을 갖고 시간이 사회적으로 조직된다고 하면서 이를 ‘사회적 시간’이라 불렀다. 사회적 시간은 자연이 스스로 갖는 시간과 달리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시간이다. 근대사회는 시간으로부터 그 본래의 의미를 없애고 추상적으로 분할 가능한 시간 계산을 발달시켜 왔다. 근대 기계문명의 첫 번째 특징은 시계를 통해 만들어내는 시간의 규칙성이다. 규격화된 단위로 분절하여 측정가능한 것으로 만든 게 곧 시계시간이다.

시간이 사회를 파고들어 규칙화한 것은 6세기 베네딕투스 수도원(유럽에 4만개 있었음)의 시간관리체계 하에서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시간의 낭비는 죄로 인식되면서 시간에 의한 사회적 규율과 규칙화가 생겨났다. 그러나 16세기까지만 해도 영국의 일상생활은 ‘하루’가 중심이었다. 16세기부터 집과 공공장소에 시계가 들어오면서 18세기까지 시계시간에 맞추는 사회의 재조직화가 혁명적으로 이루어졌다. 시간표에 맞춘 학교교육, 청교도의 주 단위 작업, 시간단위 노동·임금에 의한 고용관계, 일상 업무에서 ‘시간엄수’가 일반화되었다.

시간이 시계기간으로 표준화되고 모든 일상이 그에 맞춰 꾸려지면서 시계시간은 절대적 권력이 되었다. 하지만 시계시간은 기본적으로 수학적 허구다. 시간에서 인간경험을 거세하면서 숫자로 허구화된 게 시계시간이다. 사회생활 곳곳으로 스며들면서 시계시간은 자연의 시간, 본래의 시간을 지워버렸다. 프랑스 철학자 르페브르는 그래서 사회와 자연으로 시계시간이 퍼져감으로써 ‘살아 있는 시간’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전근대사회에서는 살아 있는 시간이 공간에 새겨져 있고 나이테처럼 성장의 세월을 흔적으로 남겼지만 근대에 이르러 사회 속으로 시간이 흡수되면서 살아 있는 시간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시간의 속성을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으로 나누어 전자를 크로노스 시간으로, 후자를 카이로스 시간으로 불렀다. 제우스 아버지인 크로노스(Chronos)는 농경과 계절의 신, 즉 시간의 신으로 물리적이고 불변적인 시간을 상징한다. 이는 오늘날 시계시간에 가깝다. 반면 제우스의 아들인 카이로스(Kairos)는 기회의 신으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시간을 상징한다. 이는 시계시간의 지배 하에서 억압되고 사라진 ‘살아 있는 시간’과 유사하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존재는 근원적으로 시간적이라 했다. 즉 태어나서 죽음을 향해가는 사이에 있는 것이 곧 인간의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간격이나 순간과 같이 계측에 의한 시간을 존재의 시간성으로 혼돈되어선 안 된다고 했다. 베르그송은 살아 있는 지속이 곧 진정한 시간이라고 했다. 시간을 분리된 요소 내지 외부에 존재하지 않고 시간 속에 사람이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이런 의미의 살아 있는 시간은 카이로스 시간이다. 우리는 크로노스 시간 속에 갇힌 외형적(사회적) 삶을 살지만, 몸속엔 살아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 시간이 흐르고 있다. 카이로스 시간의 복원은 곧 인간이 진정한 존재로 돌아가는 것이다.